(문화재청) 쓰일 곳 없는 공부, 그래서 순수하고 깊은 공부 조선 후기 여성 지식인의 계보...

작성일
21-03-07
작성자
여규철
조회수
2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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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일 곳 없는 공부, 그래서 순수하고 깊은 공부 조선 후기 여성 지식인의 계보, 임윤지당과 강정일당 ‘입신양명’이라는 명제는 유교사회에서 공부가 ‘사회적 성취에 관련된 일’임을 잘 보여준다. ‘자기를 드러내어(立身)’, ‘이름을 떨치는 것(揚名)’은 공부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여성들에게 공부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권장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허용된 적이 없는 ‘금지’의 영역이었다. 여성들에게는 생각이나 견해를 가지는 것,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어떠한 형태의 말과 글도 원천적으로 허락되지 않았다. 진서(眞書, 한문), 즉 진정한 문자가 아닌 한글만이 제한적으로 주어졌을 뿐이다. 그런 시대에 여성 지식이 형성되고, 여성 지식인의 존재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아주 드물지만 조선시대 여성 지성사라고 부를 만한 여성 지식인과 문인, 글쓰기의 계보가 전해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임윤지당(1721~1793)과 강정일당(1772~1832)이다.

윤지당과 정일당, 세대를 뛰어넘은 여성 성리학자로서의 사제 관계

윤지당과 정일당은 근래 들어 알려지기 시작한 조선 후기 여성 성리학자다. 윤지당의 글은 그의 남동생인 임정주가 모아 펴낸 『윤지당유고』가 전해지고 있으며, 정일당의 저술은 남편인 윤광연이 편찬한 『강정일당유고』가 남아 있다. 이들의 문집은 공히 감상적인 시문이 아니라 경전에 대한 주석과 이기심성론에 대한 철학적 견해를 담은 학문적 논설, 문답을 담은 한문 서간이 주를 이룬다. 두 문집 모두 당대의 이름 있는 학자들이 그 예외적인 학문의 수준을 높이 평가한 내용의 서발문이 실려 있기도 하다.


그런데 윤지당과 정일당이 살았던 시대는 두 세대가량 차이가 나고 서로는 만난 적도 없는 사이였다. 가문 배경도 완연히 달라서 윤지당이 노론의 핵심 가문 출신으로 형제들이 모두 명망 있는 성리학자로 추앙받았던 것에 비해 정일당은 충청 지방의 한미한 잔반 출신으로 생업을 위해 남편과 떠돌아야 했을 만큼 어려운 처지였다. 그럼에도 이들은 성리학이라는 남성적 학통 속에서 매우 드문 ‘여성 성리학자’로 당대 지식인 들에게 인정받았고, 사후에는 문집이 간행되기까지 했다.


더욱이 정일당은 윤지당의 글을 읽고 그의 경전 해석과 견해를 깊이 따르며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어서, 이들의 관계를 일종의 ‘사제 관계’로 볼 수 있기도 하다. 성리학이라는 남성적 학통 속에 세운 여성 사승(師承) 관계인 것이다. 이들은 학문을 어디서 어떻게 습득한 것일까? 과연 그 학문의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01.동생 임정주가 임윤지당의 학문적 행적을 엮어 사후에 발간한 『윤지당유고』©원주역사박물관 02.임윤지당의 성리학적 업적을 담은『윤지당유고』©원주역사박물관 03.남편 윤광연이 정일당의 학문적 가치를 기리고 그리움을 담아 편찬한『정일당유고』©경기도박물관

금수저 학자 집안 대 흙수저 몰락 양반

임윤지당의 학문 연원은 단연 가문 배경과 형제라고 할 수 있다. 풍천 임씨는 대대로 고관을 역임한 노론 계열의 관료학자 집안이었다. 이 당시 노론 벌열가에서는 재능 있는 딸에게 원래는 허여되지 않았던 경전 교육을 시킨 사례가 종종 발견되곤 했는데, 안동 김씨 가문의 김창협의 딸 김운과 곽청창 같은 이들이 바로 그런 경우다. 윤지당의 부친인 임적과 모친 파평 윤씨 또한 자녀들의 교육에 남녀의 제한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형제들은 어머니 곁에 모여 앉아 경전과 역사서의 의리를 논했다. 고금의 인물과 치란의 잘잘못을 논할 때 누이는 조용히 한마디 말로 그 옳고 그름을 말하곤 했는데 정확히 핵심을 짚는 말이어서 형들이 탄복하곤 했다. - 동생 임정주가 엮은 『윤지당유고』


윤지당은 5남 2녀 중 차녀였다. 이들 형제 중에는 재원이 많아서, 18세기 재능 있는 인물들의 행적을 모은 『병세재언록』에 오빠 임명주, 임성주, 임경주, 그리고 동생 임정주와 윤지당 본인까지 다섯 명이 이름을 올릴 정도였다. 위 글은 형제들이 모여 앉아 함께 책을 읽고 공부하며 토론하는 장면을 회고한 임정주의 글인데, 그중에서도 식견이 남달랐던 윤지당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오빠 임성주는 그에게 당호를 지어주었고 이종사촌인 송문흠은 도장을 새겨주기도 했다. 뛰어난 가문의 특별한 남자형제들이 윤지당에게 보냈던 애정과 인정의 시선을 알 수 있다. 결혼 후에도 윤지당은 당대 최고의 도학자였던 둘째 오빠 임성주와 평생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으며 공부한 내용을 바로잡고 문답을 나누며 토론을 했다. 남편이 일찍 죽고 시어머니마저 돌아가신 후 윤지당은 더욱 학문에 침잠했다.


시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형수 또한 늙었을 때였다. 간혹 집안일을 하시다가 여가가 나면 밤이 깊은 후 보자기에 싸두었던 경전을 펴놓고 낮은 목소리로 읽으셨다. 창밖으로 등불이 형형하게 비치는 것을 보고서야 형수에게 남모르는 공부가 있음을 알았다. 우리 형제가 다짐하기를, “형수도 저렇듯 부지런히 공부하시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는가.”라고 했다. 시동생 신광우가 윤지당을 회고하면서 쓴 글이다. 나이 들어서도 밤늦게까지 꼿꼿하게 불을 밝히고 앉아 낮은 목소리로 경학 연구에 몰두했던 윤지당은 시동생들에게도 옷자락을 여미고 자신을 돌이켜 보게 만드는 존경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04.책가도가 그려진 병풍 ©국립민속박물관

이에 비해 정일당의 학문 경로는 조금은 외롭고 노동의 땀 냄새가 밴 것이었다. 정일당은 아버지에게 여덟 살 때부터『시경』과 『예기』를 배우긴 했으나 부친을 일찍 여의고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밤새 바느질과 베 짜기를 도와야 했다. 충북 제천의 외진 시골, 정일당의 가문은 조부와 부친이 단명하면서 몇 대째 관리를 배출하지 못해 이름만 남아 있는 가난한 양반가였다. 스무 살에 혼인한 남편 윤광연의 집안은 가세가 더욱 기운 몰락 양반이었다. 윤광연 자신의 거처조차 마땅치 않아 형수의 친정에 얹혀살 지경이었고, 정일당과 혼인한 후에도 유랑하듯 떠돌며 근근이 먹고 살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정일당은 남편에게 ‘배워야만 사람 도리를 할 수 있다’면서 ‘좋은 스승과 동학이 있는 곳에 나아가 정식으로 배울 것’을 간청했다.


가난한 선비 윤광연은 아내의 끊임없는 충고와 격려에 힘입어 제대로 된 공부의 길에 나서게 된다. 그는 당대 최고의 도학자로 꼽히는 송치규, 홍직필 등에게 경전을 배우기 시작했고, 정일당은 남편의 학문을 도왔다. 정일당의 진짜 공부가 시작된 것도 바로 이때였다. 남편의 학문을 격려하면서 쓴 한문 쪽지 편지인 척독(尺牘)과 남편의 스승과 동학들에게 경전의 해석을 대신 묻는 대작(代作) 편지들을 수십 편씩 쓰면서 정일당의 학문적 탐구도 나날이 깊어졌다.


군자가 세상에 처신함에 없어지고 자라는 이치와 사물의 변화는 마땅히 미루어 궁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산천재 김상악의 역학(易學), 심처사 팔년당의 수론(數論)은 그 뜻이 정밀하고 설명이 상세하여 진실로 잘 배운다면 그 요점을 알 수 있습니다. 청하건대 육경(六經)을 연구하고 뜻을 이해하려 애쓰며 남는 시간에 계속 힘쓰십시오. 남편에게 보낸 정일당의 편지는 그의 학문을 지지하고 보조하는 역할에서 훨씬 더 나아가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남편보다 한 걸음 앞에서 그의 공부를 이끌었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존경하고 믿고 따랐다.


부인, 내가 그대를 잃었으니 참으로 막막하오. 이제 공부하다 의심나는 것이 있을 때 누구에게 물어보며,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누가 그걸 할 수 있게 해주겠소? 내가 뭘 잘못하는 게 있어도 누가 바로잡아주겠으며, 큰 잘못을 저질러도 누가 타일러 주겠소? 아내 강정일당이 죽고 며칠 뒤에 윤광연이 쓴 제문이다. 그는 다른 글에서 아내를 ‘스승같이 나를 이끌어주던 사람’이라고도 했고, ‘정일당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알 수 없다’고도 했다. 인생에서 스승이자 멘토였던 아내를 잃은 슬픔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05.문방사우 중 하나인 벼루 ©국립민속박물관 06.붓을 꽂아 담는 필통 ©국립민속박물관

쓸데없음의 쓸모, 무용지대용(無用之大用)

윤지당과 정일당의 특별함은 단지 여자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공부를 했다는 것에 있지는 않다. 이들은 공부하며 지적 소양의 수련과 연마, 참된 성정을 깨닫고 인간 내면을 찾겠다는 성리학의 본질 그 자체를 구현했다. 두 인물의 학문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를 보고 벼슬을 한다는 현실적 목표에 가로막힌 ‘여자의 공부’였기에, 오히려 ‘인간의 심성을 갈고닦아 성현의 경지에 이른다’는 학문의 본질적 목표에 가장 근접한 성취를 이루었던 것이다.


형수는 예법을 애호하고 경전과 역사에 침잠하셨다. 사색은 정밀하고 마음가짐은 철저하며 지혜는 밝고 행실은 수양되어 표리가 한결같으셨다. 순수하고 평화로운 경지를 성취하신 것이 오래 덕을 쌓은 큰 선비와 같았다.- 『윤지당유고』에 쓴 시동생 신광우의 발문


부부간이지만 존경하는 스승을 만난 듯 엄숙해서 부인과 마주하면 마치 신명을 대하는 것 같았고 대화를 나눌 때면 내 견해는 어둡게만 느껴졌다.- 『정일당유고』에 쓴 남편 윤광연의 서문


두 여성 성리학자의 삶과 학문은 현실에서 아무 쓰일 곳이 없는 여성의 공부가 ‘가장 본질적인 쓸모’를 구현하였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학문의 본질을 돌이켜 보게 만드는 ‘쓸데없는 것의 큰 쓸모’, ‘무용(無用)함의 대용(大用)’이었다.



글. 홍인숙(홍익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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